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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4 ] 25년간 변함없이 한결같은 성품의 겸손한 사역자 손원배 목사

25년간 변함없이 한결같은 성품의 겸손한 사역자 손원배 목사
3교회의 화합으로 아름답게 성장해온 임마누엘 장로교회 담임 목사

밀피타스에 위치한 임마누엘 장로교회(www.kepc.org)사무실에서 손원배 담임목사를 만났다. 그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마디로 겸손한 사람이라 평한다. 큰키로 허리를 굽혀 단정히 인사를 하며, 성심을 다해 귀 기울이는 그의 성실한 태도와 어떤 질문에도 거리낌 없이 솔직한 대답을 이어가는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손원배 목사의 소망과 그의 삶을 엿보며 나의 신앙을 다시한번 되짚어보는 귀한 기회가 되었다.
만난사람 발행인 아이린 서

손원배 목사는 강원도 향로봉에 단 2 가정밖에 없는 산속의 외로운 군인 마을에서 군인인 아버지와 어머니사이에 2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손목사의 이모는 이모부를 잃고 3자녀들을 홀로 키우고 있었는데, 선교사를 만나 가족중에 최초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손목사가 6살때,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용인에 사는 이모의 작은 단칸방에서 함께 살게되었다. 어렵고 고된 삶을 살면서도 매일 새벽예배에 참석하며 굳건히 신앙생활을 하셨다.

손 목사는 고등학교 1학년때, 소련선교에 대한 꿈을 갖게되어 외국어 대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다. 졸업후 몇년간 삼성에 근무했고, 총신대 신학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도미해 미시간주의 캘빈신학 대학원에서 석사(Th, M)학위를 받고 필라델피아의 웨스트 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후 91년 가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손원배 목사는 손경아씨와 결혼해 두 아들(28세, 22세)을 두고 있다. 큰 아들은 U.C. 버클리에서 건축학 전공후 중국 선교를 다녀온후 선교사명을 갖게 되어 신학을 마쳤고, 올 7월 보스톤에서 결혼후 곧 중국 선교사로 떠날 예정이다. 작은 아들은 U.C. 데이비스 3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임에도, 지난 1년간 중국에 단기선교활동을 했다. 북한 꽃제비 출신의 탈북 고아 청소년을 독립할때까지 집에서 양육하기도 했다.

임마누엘 장로교회는 1980년도 초대 림택권 목사가 개척해 2년간 사역을 하다, 필라델피아의 필라연합교회로 부임을 하게 되면서 교회가 '임마누엘' 과 '브니엘 장로교회'로 분열됬고, 다시 8 가정이 나와 '온누리 장로교회'를 개척하게되면서 3개의 교회로 나뉘었다.

림택권 목사의 주선으로 손목사가 92년 3월 '온누리 장로교회'의 목사로 부임했고 바로 92년 4월 '브니엘 장로교회'와 연합했다. 그때 성인 교인이 대략 40~50명 정도였는데, 부임후 2년후 장년 약 100명정도로 부흥했다. 후에, 94년 1월 '임마누엘 장로교회'와도 연합했다.

모두 연합한후 약 2년간 화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서로 언성이 높아지는 일들도 있었다. 출신 교회에 따라 서로 물과 기름같이 따로 분리가 되며 신앙생활에 기쁨들을 잃어가는 어려운 시기에 봉착했다. 어느날 몇몇 교인들이 심사숙고해 교회 분리안을 만들에 손목사에게 간청했고, 손목사는 그들의 의견에 수긍했다. 그날 밤, 이 문제를 놓고 기도 하는데 응답주시기를, 교회가 수없이 갈라지는데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아느냐고, 교회가 화합하는것을 보고 싶다는 응답을 받게 되었고, 그는 순종하겠다고 약속 드렸다. 바로 다음날 분리를 위해 계획했던 분들에게 목사로서의 체면을 개의치 않고 말을 바꾸어 전날 수긍했던것을 취소하며 하나님의 응답에 순종하겠다고 밝혔다. 더욱 절실히 기도와 설교에 전심을 다했다. 여러해가 지난후 돌이켜 보니 그 때 부터 교인들의 마음에 신앙심이 더욱 굳건해지고 화합하기 시작했고 매년 100여명이상씩 부흥을 했다. 손목사는 한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성품이어서 하나님의 일에만 최선을 다해왔다. 새벽에 집에서 나와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이 지속됬고, 몇 년후 어느날 아내가 아들둘을 데리고 낮에 교회 사무실로 찾아와서 '아이들에게 아빠 얼굴을 좀 보여줘야 할것 같아서 왔다' 고 하기도 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라고 전한다.

98년 4월 산타클라라 홈스테드로 교회를 확장 이전했다. 당시 갓 도미한 필자는 임마누엘교회 예배에 처음 참석했는데, 오후 기도원모임 공지를 듣고 모임에 참석했다. 손목사와 장로 한분, 그리고 연세가 지긋한 권사 5분이 있었는데, 손목사는 권사들 한분 한분 차량에 태워 드리며, 반갑고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우리 권사님들이 교회의 가장 큰 보물'이라고 말했다. 기도원에서도 권사들을 오랜만에 만난 친어머니를 대하듯 아끼며 절실히 기도하고 말씀을 나눴다.
특히 한 권사는 아주 체구가 작고 허리가 조금 휘었는데, 손목사는 더욱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중에 안 일 이지만, 이 권사는 어려운 살림에서도 항상 행복한 모습으로 아파트에 있는 커다란 쓰레기통에 들어가 재활용품등을 주어다 팔아 필요한 주님의 사역에 도움을 주는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전했다. 어느날 작은체구로 쓰레기통에 들어가 여러 물품을 줍던중, 누군가가 던진 커다란 쓰레기에 깔려 허리를 다쳤다고 한다. 그렇기에 손목사는 더욱 이 권사님을 애틋하게 아끼셨으리라 생각한다. 필자가 보아온 손목사는 교인의 지적능력이나 재력, 언변력, 외모등에 편견과 편애가 전혀 없다. 언제나 한사람 한사람 소중한 마음으로 대하며 오히려 연약한 사람들을 더욱 따뜻하게 살피며, 시종일관 동일한 성품으로 목회를 이어오고 있다.

2007년 7월 교회가 밀피타스시에 큰 예배처소로 이전했다. 손목사 표현을 빌리자면 본인은 남들보다 나을것도 없는 변변찮고 부족한 종인데, 교인들이 계속 늘어가자 기도를 드리며, 왜 이렇게 교인들을 보내주시는지 언제까지 계속 보내주실 것인지 여쭤보았는데, 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본분과 겸손함을 지키는 때 까지 계속 될 것 이라는 응답을 받았다.

손목사는 올해 임마누엘 장로교회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의 양육에 헌신할 계획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길 작은 교회를 수천명에 달하는 큰 교회로 성장시켜놓고 아직 젊은 50대의 나이에 그렇게 훨훨 떠나다니 아깝지도 않느냐고들 한다. 이에 대한 그의 답은 분명하다. 빈손으로 목회를 시작했고, 목회하는 동안 행복했음에 만족하며, 교회는 어느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처소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분명히 전한다.

그는 교회 건물의 웅장함에 포로가 되지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초대 교회는 초기 300여년간 교회의 건물이 없었고, 가정에서 들에서 산에서, 어디에서나 홀로 혹은 두셋이 모여 예배와 기도를 지속했었고, 장소에 구속받지 않고 예배드리는것 자체가 진정한 교회라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4세기경 로마황제 콘스탄트 대제에 의해 교회 건물들을 웅장하게 짓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 신전을 세웠던 경험에 토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경우를 보자면, 1949년 모택동의 공산당 혁명후, 1960년 문화 대 혁명등을 거치며 1978년 등소평이 문호를 개방할 시기까지 약 30여년간 극도로 기독교에 대해 추방, 고문, 학살등의 대규모 탄압이있었다. 1949년 이전 약 70만명으로 추산되었던 기독교인들이 30여년의 극심한 탄압속에 오히려 7,000 만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교회 건물은 하나도 없었고, 오로지 지하 가정교회로 더욱 부흥했다.

손목사는 새로 사역을 시작하는 젊은 후배 목회자들에 대한 조언으로, 진실로 한 영혼이 천하보다 소중하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할것을 당부한다. 교인의 숫자에 마음을 쓰는것이 아니라 그들중 한명의 신앙이 성장할때 기뻐하고, 전심을 다할것을 바란다. 미국에서 신앙생활하는 교인들에게는 먼저 첫번째로는, 모든것이 풍족한 미국에 살며 간절함이 적어진 상황에서도 신앙심을 잃지않는 교인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고, 두번째로는 교회에 나오는것에 만족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나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드리도록 함께 끊임없이 노력하자고 전한다.

처음과 끝이 동일한 사람,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며, 주님께 순종하여 언제라도 훨훨 떠날 준비가된, 겸손함이 몸에 배인 손 원배 목사와 그의 가정에 언제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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