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혀여.....파76 10/15 464-469면...댁이 말하는 내용이요..잘 읽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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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대해 균형잡힌 견해를 가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1, 2. 세월의 흐름에 대해 우리는 모두 무엇을 경험합니까?
생명은 귀중한 재산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소용없읍니다. (마태 6:25-27; 16:26) 현대에 와서도 인간 수명은 길어지지 않았으며, 생명은 너무 일찍 끝나고 맙니다. 시편 90편의 필자는 오래 전에 이렇게 표현하였읍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2 많은 지방에서는 사람이 30세에 달하면 “인생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인간 수명이 짧기 때문에 그는 이미 신체적으로 ‘내리막 길’에 들어가기 시작하며 신체 능력과 기능이 저하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은 그토록 신속히 지나갑니다.
3. 왜 사람들은 자기들의 염원이 달성되는 것에 관해 조급해합니까?
3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일반적으로 때에 대해 매우 민감한 것도 당연합니다. 지상의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지성적으로 미래를 염려하고 적극적으로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며 미래의 일에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읍니다. (전도 3:11)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세월이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급하게 자기들의 염원이 달성되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읍니다.
4, 5. (ㄱ) 여호와 하나님은 때에 대한 견해가 어떻게 다릅니까? (ㄴ) 일을 행하기 위해 때를 정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방법보다 왜 더 바람직합니까?
4 그러므로 불완전한 인간의 입장은 영원하고 끝없이 존재하시는 창조주의 입장과 매우 다릅니다. 시편 90편의 필자는 그분에 관해 이렇게 썼읍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니이다].”—시 90:2-4.
5 그렇다고 여호와 하나님은 때에 대해 무관심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미래에 대해 그리고 사태 진전에 관해 예리하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불완전하고 단명한 인간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보시기 때문에, 수명이 다하기 전에 어떤 일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조급함으로 압력을 받지 않으십니다. (시 90:2; 베드로 후 3:8) 하나님은 전체적인 세월의 흐름을 검토하시어 바로 정확한 때에, 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고 관련된 모든 자에게 가장 좋은 때에, 자기의 불변하는 목적을 이루도록 하실 수 있읍니다.
6. 하나님은 영원이라는 시간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어떤 일을 지정된 때에 수행하겠다고 계획하지 않으십니까?
6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알고 계시며 전능하시기 때문에, 미래에 관한 특정한 시간 계획을 따르실 수도 있으며, 때로는 이 시간 계획을 인간에게 알리기도 하셨읍니다. 예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라].” (창세 15:13; 사도 7:6, 7) 이 예언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400년이 끝난 때에 ‘아브라함’의 자손 곧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읍니다.
7. (ㄱ) ‘유대’인의 ‘바벨론’ 유배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시간 계획은 어떻게 정확하였읍니까? (ㄴ) 메시야의 나타남에 관하여는 어떠합니까?
7 후에,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대해 70년의 황폐 기간을 예언하셨는데, 그 기간이 끝나자 ‘유대’인들은 계획된 그때에 석방되었읍니다. (예레미야 25:8-11; 다니엘 9:2)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난 때로부터 483년(햇수로 69“주”) 후에 메시야가 나타날 것이 예언되었는데, 기원 29년에 그 기간이 끝나자 정확한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고 약속된 메시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읍니다.—다니엘 9:24-27.
8. 하나님께서 정확한 시기를 발표하지 않으신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목적이 이루어질 시기를 알아낼 수 있읍니까?
8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실현하실 때를 알리시면 충실한 종들은 발표된 계획의 정확성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발표가 없는 경우에는 그 목적의 실현 시기를 알아낸다는 것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큰 환난”이 돌발할 시기도 그러한 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인 그 “큰 환난”이 지난 다음에 천년간의 왕국 통치가 시작될 것이며, 그 왕국 통치에 의해 지구와 그의 거민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이를 것이라고 예언하셨읍니다.—마태 24:21, 22; 계시 7:14-17.
은폐된 일들과 나타난 일들
9. ‘모세’에 의해 신명기 29:29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목적의 이해에 관해 무엇을 알려 줍니까?
9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떤 지식을 자기만 알고 계시는 것이 이상합니까?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 접근하였을 때에 예언자 ‘모세’는 신명기 29:29에 다음과 같이 영감받은 말씀을 기록하였읍니다. “오묘한[은폐된, 신세]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충실히 섬기기 위하여 참으로 알 필요가 있는 것, 희망과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 주십니다. 그러나 은폐하는 것이 목적에 더 부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손해나 어려움을 주지 않고 문제를 은폐하실 수도 있읍니다.
10. (ㄱ) 승천하기 직전에 하신 예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때 혹은 날짜를 아는 점에 관해 무엇을 밝혀 줍니까? (ㄴ) 일부 초기 제자들이 사건들의 때에 관해 잘못을 범하였을 때에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편지하였읍니까?
10 더 큰 ‘모세’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이것은 왕국의 회복에 관해 질문을 받고 대답으로 하신 말씀이었읍니다. 제자들은 왕국의 회복을 열렬히 바랐던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신 때와 기한’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읍니다. (사도 1:6-8; 3:20-23) 하나님께서는 나타난 뜻에 일치하게 일과 봉사를 수행하도록 그들에게 권능을 부여하셨읍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일들이 있었으며, 후에 일부 제자들은 약속된 어떤 사건들에 관하여 함부로 결론을 내리려고 하였읍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사건들을 독촉한 것과 같았읍니다. (데살로니가 후 2:1-5 비교) 그러나 강한 믿음과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지혜롭게 행동하기 위해 그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셨읍니다.
11. 제자들은 ‘예루살렘’이 멸망될 정확한 날짜를 알았읍니까? 아니면, 무엇을 알았읍니까?
11 기원 제1세기 ‘예루살렘’의 멸망 사건이 그러하였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당시 ‘유대’교 중심지인 그 불충실한 도시가 멸망되기 직전의 세상 상태를 알려 주셨읍니다. 그 “징조”를 이루는 상태들을 보면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 것입니다. (누가 21:10-20)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가 13:30)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이 당장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 그 세대에 관련되는 문제였읍니다. 그러나 그 일이 발생할 정확한 때는 알려 주시지 않았읍니다.
12. (ㄱ) 날짜를 모르는데 ‘예루살렘’ 내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 도시가 멸망되기 전에 피신할 수 있었읍니까? (ㄴ) ‘예루살렘’의 포위가 풀어진 직후에 도망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시험이 있었읍니까?
12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징조가 성취되었을 때에 그 때가 도달하였읍니다. ‘로마’ 군대가 일시적으로 뜻밖에 철수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멸망될 도시를 탈출하여 산간 지방에 피신할 수 있었읍니다. 그들은 그때에도 실제 멸망이 언제 발생할지를 몰랐읍니다. 사실상, 그들이 도망한 후 ‘예루살렘’이 멸망된 때까지 약 4년이 흘렀읍니다. 그 기간에 그들이 경계를 게을리하고 자기들이 징조를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찌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라는 예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누가 21:20, 21.
13. (ㄱ)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예수의 무슨 예언이 실제 성취되었읍니까? (ㄴ) 그때 경고는 정확한 날이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하였읍니까?
13 그 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 경고한 그 사건의 성취를 목격하였다는 그 사실은 분명합니다. 주의를 기울이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비참한 재난을 모면하였읍니다. 그러나 역사에 의하면 수십만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읍니다. 그 사람들은 사실상 그 당시 상태의 심각성에 대하여 그리고 그 시대의 긴급성에 대하여 잠자고 있었읍니다. ‘로마’가 최종적으로 군대를 다시 파견하여 기원 70년에 포위를 하였을 때에 그 도시는 그 해의 유월절 축제 참석자들로 가득 차 있었읍니다. 약 5개월간에, 외부에서 온 사람들과 그 지역 주민 수십만명이 죽음을 당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경고에 믿음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그들은 ‘그들이 감사받는 때를 알지’ 못하였읍니다.—누가 19:41-44, 신세.
14, 15. 그 당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경고가 우리 시대에 세계적으로 성취되리라는 어떤 증거가 있읍니까?
14 오늘날 우리는 그 중대한 시기로부터 19세기가 지난 후에 살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훨씬 더 위험합니다. 제1세기 말경,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멸망된지 수십년 후에,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언에서 제자들에게 “징조”로 말씀하신 동일한 것들을 묘사하였읍니다. 그러나 ‘요한’이 예수로부터 받은 「계시록」은 장래의 일,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었읍니다. (계시 1:1) 그리고 ‘요한’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징조”는 전쟁, 기근, 높은 식품 가격, 질병 등 전세계 각처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로서 세계적인 규모로 발생되게 되어 있읍니다. (계시 6:3-8) 그 다음에 ‘요한’은 모든 나라와 족속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 곧 하나님의 종들의 “큰 무리”가 안전하게 살아 통과할 “큰 환난”에 관해 언급합니다. (계시 7:9-15) 그 환난 역시 장차 있게 될 일들 중 일부였읍니다.
15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과 누가복음 21장에 기록된 바 “큰 환난”에 관한 예수의 예언이 제1세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나타내 줍니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이 겪은 환난이 그 예언의 소규모적 성취에 불과하며 그것이 온 땅에 대규모적으로 성취될 때에는 ‘예루살렘’의 환난이 아주 적게 보일 것을 알려 줍니다. 제1세기에 살아서 예수의 경고를 들었던 세대가 그의 말씀의 성취를 경험한 세대였던 바와 꼭 같이, 이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날을 표시하는 예수의 “징조”의 대규모적인 성취를 본 이 세대가 장차 올 세계적인 환난을 경험할 세대일 것입니다.—마태 24:34.
16. 우리가 “큰 환난”이 돌발할 날, 심지어 해도 모르기 때문에, 냉담할 이유가 있읍니까?
16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나타내셨읍니까? 우리에게 지침이 없이 우리를 버려두지는 않으셨읍니다. 앞서 고려한 바와 같은 예언들에 의해 우리가 어느 시기에 처해 있는가를 알 수 있도록 해주셨읍니다. 그분의 예언의 성취를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무시거나 느리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악행을 하는 자들에 관하여 사도 ‘베드로’가 “오래 전부터 그들에게 내려진 심판은 지체하지 않으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않”는다고 말한 바와 같습니다. (베드로 후 2:3, 새번역) 우리가 현재의 불의한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만한 증거는 많이 있읍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지 않으셨읍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지 않은 것 중 하나는 ‘예루살렘’에 닥친 환난으로 전영된 “큰 환난”, 세계적으로 발생할 환난이 돌발 할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지 않으신 때의 요소들
17. 우리가 인류 역사의 6,000년의 끝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과 하나님의 안식일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17 우리가 이것을 알 수 없는 이유들이 있읍니다. 그 한가지는, 성서 연대를 볼 때에 우리가 첫 인간 ‘아담’의 창조시로부터 6,000년 되는 시점에 도달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창조 이후 얼마만에 여섯째 창조의 날이 끝나고 하나님의 큰 안식일인 일곱째 창조 기간 곧 “날”이 시작되었는가가 성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그 “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기간 내에 악한 옛 질서가 제거되고 하나님의 아들의 천년 통치에 의해 하나님의 의로운 새 질서가 설립되어야 이치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천년 기간이 그 큰 안식일의 마지막 부분을 이룰 것이며, 그 때에 지구와 그의 거민이 완전 상태로 회복되리라고 믿을 이유가 있읍니다. 그렇게 회복되면 하나님께서 다른 창조의 날에 대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일곱째 날과 그의 결과에 대해서도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창세 1:4, 10, 12, 18, 21, 25, 31.
18, 19. (ㄱ) ‘아담’ 창조 후 하나님의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ㄴ) ‘아담’은 창조 직후에 어떤 면에서 갓난 아기와 달랐읍니까?
18 그러나 그 큰 안식일은 ‘아담’의 창조 후 즉시 시작되지 않았읍니다. ‘아담’이 창조되고 나서 여섯째 창조의 날이 끝나기 전에 다른 사건들이 있었읍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성이 있읍니다. 그것은 첫 여자 ‘하와’의 창조입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살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1:12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읍니다.
19 남자의 창조와 여자의 창조 사이에 얼마의 세월이 흘렀읍니까? 성서는 이 점을 밝히지 않습니다. ‘아담’은 아기나 소년으로 창조되지 않고, 다 자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온전히 장성한 어른으로 창조되었읍니다. 그는 처음에 기어다니다가 걸음마를 배우거나 응얼대는 소리를 내다가 나중에 말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창조되었으며, 하늘에 계신 창조주와 대화를 할 수 있고, 자기의 거처인 동산을 개척하고 손질할 수 있었읍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훈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령도 이해할 수 있었읍니다. (창세 2:15-17) 그러한 점에 있어서는 그가 언제나 아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에 있었읍니다.
20. 그러나 어떤 면에서 ‘아담’은 창조되었을 때에 갓난 아기와 비슷하였읍니까?
20 그렇지만, 창조 직후에 ‘아담’이 어떤 면에서는 갓난 아기와 같았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다 자란 어른이기는 하지만, 그가 창조되었던 날은 그래도 자기 생애의 첫 날이었읍니다. 그의 눈에 보인 모든 것, 모든 나무, 꽃, 풀, 개천, 호수, 강, 모든 새, 짐승, 물고기 등은 그가 처음으로 보는 것들이었읍니다. 그의 활동도 모두 그러하였읍니다. 그가 걸음을 걸었을 때에 그는 첫 발을 디딘 것이며, 달리고, 언덕을 오르고, 물건을 만지고, 냄새맡고, 맛보고, 먹고 하는 모든 일은 자기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이었읍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매혹적인 작품들을 살펴보고 자기의 거처인 동산을 둘러보았을 때에 실로 굉장한 호기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가 가족의 머리로서의 부가적인 책임을 받기 전 얼마 동안이나 호기심을 충족시킬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까?
21, 22. 어떤 요인들을 생각할 때에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 ‘아담’이 ‘에덴’에서 상당 기간 혼자 있었을 가능성이 있읍니까?
21 그 ‘에덴’ 집은 조그마한 토지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창세기 제 2장에 의하면, 그 경계 안에 온갖 종류의 나무가 있었읍니다. 그리고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었던 강은 그것이 갈라져서 네 강의 근원이 될만큼 큰 강 줄기였읍니다. 그 중 어떤 강은 오늘날까지도 흐릅니다. (창세 2:8-10) ‘아담’이 보살피고 경작하도록 임명받은 그 지역을 익숙히 알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만일 그가 이런 새로운 경험들을 처음부터 인간 동료인 아내와 함께 시작하고 그와 함께 배웠다면 좋았지 않겠는가?” 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남자가 먼저 지식과 경험을 상당히 습득해 둔다면 더욱 적절하지 않겠읍니까? 그렇게 한다면, 배우자를 맞이할 때에 배우자의 질문에 대답을 해 줄 수 있고 사물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며, 유식한 머리인 남편에 대한 배우자의 존경심도 더 높아질 것입니다. (에베소 5:22, 23) 하나님께서는 금지된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금지령에 불순종할 경우의 결과를 직접 ‘아담’에게 경고하심으로써 ‘아담’을 후에 창조될 반려자에 대해 하나님의 예언자의 지위에 놓으셨읍니다.—창세 2:16, 17.
23, 24. 기간에 관하여, ‘아담’이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은 사실은 무엇을 시사합니까?
23 성서에서 실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유일한 점은,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자기가 지으신 모든 동물을 데려오시어 ‘아담’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었더라].” (창세 2:18-20) 이 일이 짧은 말로 묘사되었지만, 실제 그 일에 얼마의 기간이 걸렸읍니까?
24 「창세기」의 설명이 간략하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짐승과 새들을 함께 모으신 다음에 그것들로 ‘아담’ 앞을 줄지어 지나가게 하셨으며, ‘아담’은 즉각 하나씩 이름을 지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마 ‘아담’은 단지 기본 종류만을 대하였고 기본 종류에서 퍼진 모든 품종을 다 상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동물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다고 한 표현은 그들이 ‘아담’에게 한참 동안 접근하여 활동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한 동안 접근함으로써 ‘아담’이 그들의 독특한 습성과 형태를 관찰한 다음 각자에게 특별히 적합한 이름을 선택하였을 수도 있읍니다. 이렇게 하였다면 상당한 기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유의할 점은, ‘아담’이 결국 새로 창조된 자기 아내를 보았을 때에 그의 첫 말이 “이는 드디어 내 뼈들 중의 뼈이고 내 살 중의 살이다”라는 말을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창세 2:23, 신세) 이 말 역시 그가 얼마 동안 기다린 다음에야 훌륭한 인간 반려자를 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읍니다.
25. 인간 역사의 시작과 ‘하와’ 창조 사이,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 사이에, 얼마의 기간이 흘렀는가에 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읍니까?
25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즉, 이와 같은 요인들과 그로인한 가능성을 고려할 때에 우리는 ‘아담’의 창조와 첫 여자의 창조 사이에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가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짧은 기간으로 한 두달이었는지, 아니면 1년 혹은 그 이상이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얼마의 세월이 흘렀든지 그 기간을 ‘아담’ 창조 이후 흐른 기간에 합쳐야 우리가 하나님의 큰 안식일 곧 하나님의 일곱째 “날”에서 얼마나 지나왔는가를 알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 존재 시초부터 6,000년을 지내온 것과 하나님의 일곱째 창조의 “날”에서 6,000년을 지내온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곱째 창조의 날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얼마의 기간이 흘렀는지 전혀 모릅니다.
26, 27. 이상 논의한 사실로 볼 때에 연대는 우리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까?
26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연대가 우리에게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영감받은 말씀의 일부분으로 포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고대 예언자들에 관하여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예언자들은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 주신 사실을 따라 그 일이 어느 때에 어떤 형편으로 올 것인지를 살펴 보았읍니다.”—베드로 전 1:10, 11, 새번역.
27 오늘날 우리가 “어느 때”에 처해 있는 가를 알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고대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성취될 것을 절대적으로 믿었읍니다. 우리는 어떤 세부점들이나 시간적 요소들을 모르고 있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목적의 불변성에 대해 그와 같이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또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그 목적의 실현에 대해 깨어 있을 강력한 이유를 알려 주셨읍니다. 다음 기사에서 그 점을 알려 줍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1, 2. 세월의 흐름에 대해 우리는 모두 무엇을 경험합니까?
생명은 귀중한 재산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소용없읍니다. (마태 6:25-27; 16:26) 현대에 와서도 인간 수명은 길어지지 않았으며, 생명은 너무 일찍 끝나고 맙니다. 시편 90편의 필자는 오래 전에 이렇게 표현하였읍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2 많은 지방에서는 사람이 30세에 달하면 “인생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인간 수명이 짧기 때문에 그는 이미 신체적으로 ‘내리막 길’에 들어가기 시작하며 신체 능력과 기능이 저하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은 그토록 신속히 지나갑니다.
3. 왜 사람들은 자기들의 염원이 달성되는 것에 관해 조급해합니까?
3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일반적으로 때에 대해 매우 민감한 것도 당연합니다. 지상의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지성적으로 미래를 염려하고 적극적으로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며 미래의 일에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읍니다. (전도 3:11)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세월이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급하게 자기들의 염원이 달성되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읍니다.
4, 5. (ㄱ) 여호와 하나님은 때에 대한 견해가 어떻게 다릅니까? (ㄴ) 일을 행하기 위해 때를 정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방법보다 왜 더 바람직합니까?
4 그러므로 불완전한 인간의 입장은 영원하고 끝없이 존재하시는 창조주의 입장과 매우 다릅니다. 시편 90편의 필자는 그분에 관해 이렇게 썼읍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니이다].”—시 90:2-4.
5 그렇다고 여호와 하나님은 때에 대해 무관심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미래에 대해 그리고 사태 진전에 관해 예리하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불완전하고 단명한 인간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보시기 때문에, 수명이 다하기 전에 어떤 일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조급함으로 압력을 받지 않으십니다. (시 90:2; 베드로 후 3:8) 하나님은 전체적인 세월의 흐름을 검토하시어 바로 정확한 때에, 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고 관련된 모든 자에게 가장 좋은 때에, 자기의 불변하는 목적을 이루도록 하실 수 있읍니다.
6. 하나님은 영원이라는 시간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어떤 일을 지정된 때에 수행하겠다고 계획하지 않으십니까?
6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알고 계시며 전능하시기 때문에, 미래에 관한 특정한 시간 계획을 따르실 수도 있으며, 때로는 이 시간 계획을 인간에게 알리기도 하셨읍니다. 예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라].” (창세 15:13; 사도 7:6, 7) 이 예언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400년이 끝난 때에 ‘아브라함’의 자손 곧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읍니다.
7. (ㄱ) ‘유대’인의 ‘바벨론’ 유배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시간 계획은 어떻게 정확하였읍니까? (ㄴ) 메시야의 나타남에 관하여는 어떠합니까?
7 후에,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대해 70년의 황폐 기간을 예언하셨는데, 그 기간이 끝나자 ‘유대’인들은 계획된 그때에 석방되었읍니다. (예레미야 25:8-11; 다니엘 9:2)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난 때로부터 483년(햇수로 69“주”) 후에 메시야가 나타날 것이 예언되었는데, 기원 29년에 그 기간이 끝나자 정확한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고 약속된 메시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읍니다.—다니엘 9:24-27.
8. 하나님께서 정확한 시기를 발표하지 않으신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목적이 이루어질 시기를 알아낼 수 있읍니까?
8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실현하실 때를 알리시면 충실한 종들은 발표된 계획의 정확성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발표가 없는 경우에는 그 목적의 실현 시기를 알아낸다는 것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큰 환난”이 돌발할 시기도 그러한 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인 그 “큰 환난”이 지난 다음에 천년간의 왕국 통치가 시작될 것이며, 그 왕국 통치에 의해 지구와 그의 거민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이를 것이라고 예언하셨읍니다.—마태 24:21, 22; 계시 7:14-17.
은폐된 일들과 나타난 일들
9. ‘모세’에 의해 신명기 29:29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목적의 이해에 관해 무엇을 알려 줍니까?
9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떤 지식을 자기만 알고 계시는 것이 이상합니까?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 접근하였을 때에 예언자 ‘모세’는 신명기 29:29에 다음과 같이 영감받은 말씀을 기록하였읍니다. “오묘한[은폐된, 신세]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충실히 섬기기 위하여 참으로 알 필요가 있는 것, 희망과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 주십니다. 그러나 은폐하는 것이 목적에 더 부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손해나 어려움을 주지 않고 문제를 은폐하실 수도 있읍니다.
10. (ㄱ) 승천하기 직전에 하신 예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때 혹은 날짜를 아는 점에 관해 무엇을 밝혀 줍니까? (ㄴ) 일부 초기 제자들이 사건들의 때에 관해 잘못을 범하였을 때에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편지하였읍니까?
10 더 큰 ‘모세’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이것은 왕국의 회복에 관해 질문을 받고 대답으로 하신 말씀이었읍니다. 제자들은 왕국의 회복을 열렬히 바랐던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신 때와 기한’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읍니다. (사도 1:6-8; 3:20-23) 하나님께서는 나타난 뜻에 일치하게 일과 봉사를 수행하도록 그들에게 권능을 부여하셨읍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일들이 있었으며, 후에 일부 제자들은 약속된 어떤 사건들에 관하여 함부로 결론을 내리려고 하였읍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사건들을 독촉한 것과 같았읍니다. (데살로니가 후 2:1-5 비교) 그러나 강한 믿음과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지혜롭게 행동하기 위해 그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셨읍니다.
11. 제자들은 ‘예루살렘’이 멸망될 정확한 날짜를 알았읍니까? 아니면, 무엇을 알았읍니까?
11 기원 제1세기 ‘예루살렘’의 멸망 사건이 그러하였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당시 ‘유대’교 중심지인 그 불충실한 도시가 멸망되기 직전의 세상 상태를 알려 주셨읍니다. 그 “징조”를 이루는 상태들을 보면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 것입니다. (누가 21:10-20)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가 13:30)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이 당장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 그 세대에 관련되는 문제였읍니다. 그러나 그 일이 발생할 정확한 때는 알려 주시지 않았읍니다.
12. (ㄱ) 날짜를 모르는데 ‘예루살렘’ 내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 도시가 멸망되기 전에 피신할 수 있었읍니까? (ㄴ) ‘예루살렘’의 포위가 풀어진 직후에 도망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시험이 있었읍니까?
12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징조가 성취되었을 때에 그 때가 도달하였읍니다. ‘로마’ 군대가 일시적으로 뜻밖에 철수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멸망될 도시를 탈출하여 산간 지방에 피신할 수 있었읍니다. 그들은 그때에도 실제 멸망이 언제 발생할지를 몰랐읍니다. 사실상, 그들이 도망한 후 ‘예루살렘’이 멸망된 때까지 약 4년이 흘렀읍니다. 그 기간에 그들이 경계를 게을리하고 자기들이 징조를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찌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라는 예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누가 21:20, 21.
13. (ㄱ)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예수의 무슨 예언이 실제 성취되었읍니까? (ㄴ) 그때 경고는 정확한 날이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하였읍니까?
13 그 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 경고한 그 사건의 성취를 목격하였다는 그 사실은 분명합니다. 주의를 기울이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비참한 재난을 모면하였읍니다. 그러나 역사에 의하면 수십만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읍니다. 그 사람들은 사실상 그 당시 상태의 심각성에 대하여 그리고 그 시대의 긴급성에 대하여 잠자고 있었읍니다. ‘로마’가 최종적으로 군대를 다시 파견하여 기원 70년에 포위를 하였을 때에 그 도시는 그 해의 유월절 축제 참석자들로 가득 차 있었읍니다. 약 5개월간에, 외부에서 온 사람들과 그 지역 주민 수십만명이 죽음을 당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경고에 믿음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그들은 ‘그들이 감사받는 때를 알지’ 못하였읍니다.—누가 19:41-44, 신세.
14, 15. 그 당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경고가 우리 시대에 세계적으로 성취되리라는 어떤 증거가 있읍니까?
14 오늘날 우리는 그 중대한 시기로부터 19세기가 지난 후에 살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훨씬 더 위험합니다. 제1세기 말경,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멸망된지 수십년 후에,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언에서 제자들에게 “징조”로 말씀하신 동일한 것들을 묘사하였읍니다. 그러나 ‘요한’이 예수로부터 받은 「계시록」은 장래의 일,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었읍니다. (계시 1:1) 그리고 ‘요한’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징조”는 전쟁, 기근, 높은 식품 가격, 질병 등 전세계 각처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로서 세계적인 규모로 발생되게 되어 있읍니다. (계시 6:3-8) 그 다음에 ‘요한’은 모든 나라와 족속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 곧 하나님의 종들의 “큰 무리”가 안전하게 살아 통과할 “큰 환난”에 관해 언급합니다. (계시 7:9-15) 그 환난 역시 장차 있게 될 일들 중 일부였읍니다.
15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과 누가복음 21장에 기록된 바 “큰 환난”에 관한 예수의 예언이 제1세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나타내 줍니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이 겪은 환난이 그 예언의 소규모적 성취에 불과하며 그것이 온 땅에 대규모적으로 성취될 때에는 ‘예루살렘’의 환난이 아주 적게 보일 것을 알려 줍니다. 제1세기에 살아서 예수의 경고를 들었던 세대가 그의 말씀의 성취를 경험한 세대였던 바와 꼭 같이, 이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날을 표시하는 예수의 “징조”의 대규모적인 성취를 본 이 세대가 장차 올 세계적인 환난을 경험할 세대일 것입니다.—마태 24:34.
16. 우리가 “큰 환난”이 돌발할 날, 심지어 해도 모르기 때문에, 냉담할 이유가 있읍니까?
16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나타내셨읍니까? 우리에게 지침이 없이 우리를 버려두지는 않으셨읍니다. 앞서 고려한 바와 같은 예언들에 의해 우리가 어느 시기에 처해 있는가를 알 수 있도록 해주셨읍니다. 그분의 예언의 성취를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무시거나 느리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악행을 하는 자들에 관하여 사도 ‘베드로’가 “오래 전부터 그들에게 내려진 심판은 지체하지 않으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않”는다고 말한 바와 같습니다. (베드로 후 2:3, 새번역) 우리가 현재의 불의한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만한 증거는 많이 있읍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지 않으셨읍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지 않은 것 중 하나는 ‘예루살렘’에 닥친 환난으로 전영된 “큰 환난”, 세계적으로 발생할 환난이 돌발 할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지 않으신 때의 요소들
17. 우리가 인류 역사의 6,000년의 끝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과 하나님의 안식일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17 우리가 이것을 알 수 없는 이유들이 있읍니다. 그 한가지는, 성서 연대를 볼 때에 우리가 첫 인간 ‘아담’의 창조시로부터 6,000년 되는 시점에 도달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창조 이후 얼마만에 여섯째 창조의 날이 끝나고 하나님의 큰 안식일인 일곱째 창조 기간 곧 “날”이 시작되었는가가 성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그 “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기간 내에 악한 옛 질서가 제거되고 하나님의 아들의 천년 통치에 의해 하나님의 의로운 새 질서가 설립되어야 이치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천년 기간이 그 큰 안식일의 마지막 부분을 이룰 것이며, 그 때에 지구와 그의 거민이 완전 상태로 회복되리라고 믿을 이유가 있읍니다. 그렇게 회복되면 하나님께서 다른 창조의 날에 대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일곱째 날과 그의 결과에 대해서도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창세 1:4, 10, 12, 18, 21, 25, 31.
18, 19. (ㄱ) ‘아담’ 창조 후 하나님의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ㄴ) ‘아담’은 창조 직후에 어떤 면에서 갓난 아기와 달랐읍니까?
18 그러나 그 큰 안식일은 ‘아담’의 창조 후 즉시 시작되지 않았읍니다. ‘아담’이 창조되고 나서 여섯째 창조의 날이 끝나기 전에 다른 사건들이 있었읍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성이 있읍니다. 그것은 첫 여자 ‘하와’의 창조입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살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1:12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읍니다.
19 남자의 창조와 여자의 창조 사이에 얼마의 세월이 흘렀읍니까? 성서는 이 점을 밝히지 않습니다. ‘아담’은 아기나 소년으로 창조되지 않고, 다 자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온전히 장성한 어른으로 창조되었읍니다. 그는 처음에 기어다니다가 걸음마를 배우거나 응얼대는 소리를 내다가 나중에 말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창조되었으며, 하늘에 계신 창조주와 대화를 할 수 있고, 자기의 거처인 동산을 개척하고 손질할 수 있었읍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훈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령도 이해할 수 있었읍니다. (창세 2:15-17) 그러한 점에 있어서는 그가 언제나 아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에 있었읍니다.
20. 그러나 어떤 면에서 ‘아담’은 창조되었을 때에 갓난 아기와 비슷하였읍니까?
20 그렇지만, 창조 직후에 ‘아담’이 어떤 면에서는 갓난 아기와 같았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다 자란 어른이기는 하지만, 그가 창조되었던 날은 그래도 자기 생애의 첫 날이었읍니다. 그의 눈에 보인 모든 것, 모든 나무, 꽃, 풀, 개천, 호수, 강, 모든 새, 짐승, 물고기 등은 그가 처음으로 보는 것들이었읍니다. 그의 활동도 모두 그러하였읍니다. 그가 걸음을 걸었을 때에 그는 첫 발을 디딘 것이며, 달리고, 언덕을 오르고, 물건을 만지고, 냄새맡고, 맛보고, 먹고 하는 모든 일은 자기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이었읍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매혹적인 작품들을 살펴보고 자기의 거처인 동산을 둘러보았을 때에 실로 굉장한 호기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가 가족의 머리로서의 부가적인 책임을 받기 전 얼마 동안이나 호기심을 충족시킬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까?
21, 22. 어떤 요인들을 생각할 때에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 ‘아담’이 ‘에덴’에서 상당 기간 혼자 있었을 가능성이 있읍니까?
21 그 ‘에덴’ 집은 조그마한 토지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창세기 제 2장에 의하면, 그 경계 안에 온갖 종류의 나무가 있었읍니다. 그리고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었던 강은 그것이 갈라져서 네 강의 근원이 될만큼 큰 강 줄기였읍니다. 그 중 어떤 강은 오늘날까지도 흐릅니다. (창세 2:8-10) ‘아담’이 보살피고 경작하도록 임명받은 그 지역을 익숙히 알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만일 그가 이런 새로운 경험들을 처음부터 인간 동료인 아내와 함께 시작하고 그와 함께 배웠다면 좋았지 않겠는가?” 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남자가 먼저 지식과 경험을 상당히 습득해 둔다면 더욱 적절하지 않겠읍니까? 그렇게 한다면, 배우자를 맞이할 때에 배우자의 질문에 대답을 해 줄 수 있고 사물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며, 유식한 머리인 남편에 대한 배우자의 존경심도 더 높아질 것입니다. (에베소 5:22, 23) 하나님께서는 금지된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금지령에 불순종할 경우의 결과를 직접 ‘아담’에게 경고하심으로써 ‘아담’을 후에 창조될 반려자에 대해 하나님의 예언자의 지위에 놓으셨읍니다.—창세 2:16, 17.
23, 24. 기간에 관하여, ‘아담’이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은 사실은 무엇을 시사합니까?
23 성서에서 실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유일한 점은,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자기가 지으신 모든 동물을 데려오시어 ‘아담’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었더라].” (창세 2:18-20) 이 일이 짧은 말로 묘사되었지만, 실제 그 일에 얼마의 기간이 걸렸읍니까?
24 「창세기」의 설명이 간략하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짐승과 새들을 함께 모으신 다음에 그것들로 ‘아담’ 앞을 줄지어 지나가게 하셨으며, ‘아담’은 즉각 하나씩 이름을 지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마 ‘아담’은 단지 기본 종류만을 대하였고 기본 종류에서 퍼진 모든 품종을 다 상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동물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다고 한 표현은 그들이 ‘아담’에게 한참 동안 접근하여 활동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한 동안 접근함으로써 ‘아담’이 그들의 독특한 습성과 형태를 관찰한 다음 각자에게 특별히 적합한 이름을 선택하였을 수도 있읍니다. 이렇게 하였다면 상당한 기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유의할 점은, ‘아담’이 결국 새로 창조된 자기 아내를 보았을 때에 그의 첫 말이 “이는 드디어 내 뼈들 중의 뼈이고 내 살 중의 살이다”라는 말을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창세 2:23, 신세) 이 말 역시 그가 얼마 동안 기다린 다음에야 훌륭한 인간 반려자를 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읍니다.
25. 인간 역사의 시작과 ‘하와’ 창조 사이,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 사이에, 얼마의 기간이 흘렀는가에 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읍니까?
25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즉, 이와 같은 요인들과 그로인한 가능성을 고려할 때에 우리는 ‘아담’의 창조와 첫 여자의 창조 사이에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가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짧은 기간으로 한 두달이었는지, 아니면 1년 혹은 그 이상이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얼마의 세월이 흘렀든지 그 기간을 ‘아담’ 창조 이후 흐른 기간에 합쳐야 우리가 하나님의 큰 안식일 곧 하나님의 일곱째 “날”에서 얼마나 지나왔는가를 알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 존재 시초부터 6,000년을 지내온 것과 하나님의 일곱째 창조의 “날”에서 6,000년을 지내온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곱째 창조의 날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얼마의 기간이 흘렀는지 전혀 모릅니다.
26, 27. 이상 논의한 사실로 볼 때에 연대는 우리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까?
26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연대가 우리에게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영감받은 말씀의 일부분으로 포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고대 예언자들에 관하여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예언자들은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 주신 사실을 따라 그 일이 어느 때에 어떤 형편으로 올 것인지를 살펴 보았읍니다.”—베드로 전 1:10, 11, 새번역.
27 오늘날 우리가 “어느 때”에 처해 있는 가를 알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고대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성취될 것을 절대적으로 믿었읍니다. 우리는 어떤 세부점들이나 시간적 요소들을 모르고 있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목적의 불변성에 대해 그와 같이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또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그 목적의 실현에 대해 깨어 있을 강력한 이유를 알려 주셨읍니다. 다음 기사에서 그 점을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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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1-17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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